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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업을 대하는 태도와 그 무게. (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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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업을 대하는 태도와 그 무게. (추가)

브렌쏭 2016. 8. 20. 20:53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 구장에서 열렸던 프로야구 개막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 힐던이 2루타를 날렸다. 

동시에 불현듯 내게 소설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내려왔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21세기 소설을 발명했다고도 불리는 그의 에세이는 다른 에세이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담담하고 약간은 무겁고, 진지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한 작가가 그의 업, 그의 직업, 그의 삶에 맞서는 무게가 어느정도일지 겨우 가늠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무서워졌을 정도로요, 하루키의 업에 대한 생각은 확고합니다.


 그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비평가에게 버려지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삼대가 함께 읽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작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의 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 편린 또한 이 책에 자그맣게나마 실려있습니다. 그런 개인적 궁금증도 풀 수 있을거라 기대하면서 제 방식으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책은 총 12회와 후기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12 "회", 장이 아닌 회 라는 말을 쓴 이유는 그가 강연을 하듯 업에 마주하는 그의 태도를 이야기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맘에 든 2회만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 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간인가


소설이란 것은 의외로 빠른 회전을 필요치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적당히 느린 속도로 마음 속의 것, 머릿 속의 것을 꺼내는 작업을 해내 이야기로 옮겨나가는 것이 소설쓰기라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예를 들면 "A는 B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과 소설가라는 부류는 세세하고 돌아가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머리 회전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저 바로 이해하고 지나가버리겠죠.


 이 때문에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지만, 계속 해나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몇번은 소설을 쓴다, 즉 둘러서 설명을 해간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빠르게 이해해 버리고 싫증내 버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포용적인 존재입니다. 새로운 소설가를 배척하거나 견제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들 중에 남는 건 극 소수니까요.


제 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오리지널, 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원조라고도 하죠. 음식점만 봐도 그래요, 여기저기서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습게도 천편일률적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리지낼리티" 라고 한다면 "원조다움" 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군요. 

 원조 답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만의 색채가 뚜렷해, 남들과는 다르고 굳건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루키가 말했듯, 저 또한 그 뜻을 글이나 말로 옮겨적기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단어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서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냥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스워보일지도 모르지만요. 




제가 생각해낸 얘깃거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까요?


1. 하루키의 업에 대한 태도는 굳건합니다. 매일 마라톤을 하여 육체적 힘을 기르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죠.

저는 업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무섭습니다. 제가 그것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을지, 무너지진 않을지 눈물이 흐를 지경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업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이 제게 있다고 또한 명백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제 행동을 통해 제 어깨에 쌓아올린 것이며, 그것을 올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의 포기도, 어쩔수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입니다. 

 저 자신의 포기란 무엇인가, 하면 희생과 비슷하지만 자위에 가까운 행위라고 설명드릴 수 있겠네요. 요컨대, 자기만족을 위한, 숭고한 척하는, 속내는 검은, 구역질나는 희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무감도 그것에 한몫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냥 저는 모든 것이 저의 책임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냥 어렵게 말하고 싶었던 거겠죠. 이러한 강박과 겉멋이 저를 좀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멈출수가 없습니다.



2. 하루키의 규칙적 생활과 리듬감은 칸트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틀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 이외의 모든 것에서, 특히나 정신적인 면에서 그 둘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불필요한 이벤트를 줄이면, 아차 싶은 상황도 줄어들기 마련이고, 무언가를 고려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판단의 여지를 잘라냄으로서, 오히려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만들어냈고 그것이 자유로운 삶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에는 글쎄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열성인간이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방황을 하면서 혹은 아파하면서 답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3. 이 책은 전체적으로 하루키의 진지함이 베어나와서 좋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지, 물론 그 과정에는 행운이나 우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모든 것을 그의 손으로 이뤄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그가 홀연히 내던지고 도전하는 그 상황이 감명깊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만들어낸 올가미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아니지, 지금도 아무것도 할수없지요. 그래서 인지 하루키의 삶이 더 빛나보이는 걸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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